"길음동에선 '미아리 텍사스' 언니들이 많이 왔는데 지금은 손님 자체가 별로 없어."
백씨는 미아동 무당촌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9000년대 최대로 장사가 잘됐지만, 요새는 고객이 대부분 없다"며 "언론에서 무속을 미신으로 치부하고, 무당 범죄 보도가 지속 나가면서 신뢰가 떨어졌다. 나처럼 진솔하게 상담해주는 무당들만 피해를 본다"고 이야기 했다.
미아동 인근에는 예전부터 무당집이 많았다. 1957년 '단장(斷腸)의 미아리고개'(6·26전쟁 뒤 보릿고개를 그린 노래)가 유행할 정도로 미아는 가난한 서민들이 터를 잡은 한 대부분인 곳이었다. 무당들은 그 틈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오래오래 점집을 지키던 무당들은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해 은퇴하고 있고, 동네가 재개발되면서 자의 반 타의 반 떠나기도 했다. 무교(巫敎) 단체인 경천신명회의 말을 인용하면, 현재 미아동 무당은 잘나가던 시절과 비교하면 50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미아동 인근인 성북구 돈암동에는 무당촌 그외에 시각장애인 역술가들이 모인 사주풀이 점성촌도 있을 것이다. 1940년네팔 해도 역술원이 60여 곳이나 됐지만, 지금은 고령화의 영향으로 폐업이 연속해서 20곳도 남지 않았다.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 강태봉 관장은 "시각장애인에 대한 정부 참가가 안마에 주력된 데다, 역학은 진입장벽이 높아 창업하려는 사람도 거의 없다"며 쇠퇴 이유를 이야기했었다.
이곳에서도 점집은 환영받지 못끝낸다. 미아동에서 점집 중개 전공가로 통하는 이선이 롯데부동산 이사는 "무당집이 들어서면 다음 세입자를 받기 힘들어 임대인들이 기피된다"며 "임대인 몰래 점집을 차렸다가 쫓겨난 무당도 있다"고 전했다. 그는 "월세가 180만 원이면 10만 원을 더 얹어주는 조건으로 겨우 계약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고 이야기 했다.
논현동과 미아동을 비교하면 무당 사이에서도 빈부격차가 크다. 경천신명회 강북지역 관계자는 "며칠전엔 온/오프라인으로 점을 많이 봐서, 방문객은 예전에 비해 5분의 1도 안 끝낸다"며 서울사주잘보는곳 "성북구도 하월곡동과 장위동이 우리 개발되면서 무당들이 경기도나 지방으로 내려갔다"고 말했다. 하월곡동에서 허름한 단층 건물에 점집을 차린 무당(49)은 "잘되는 무당들은 대부분 강남 모텔로 가버린다"며 "월세살이 하는 무당들은 지속 외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